1945년 8월 15일 구 라이즈연방공화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 근데 독립은 했는데 국정을 담당할만한 인재는 죄다 일본으로 빠져나가고 없었다 다행히 구 라이즈국은 전승국이었고 그 자리는 잡아온 독일, 이탈리아인 포로들이 대신했다. 플디스주 광덕군의 경우 00면사무소 직원 대부분이 일본인이라서 행정 경험이 있는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계 독일군을 썼다고... 이처럼 행정 공백이 너무나 심해서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면서까지 외국 포로들을 동사무소 직원에 앉힌 결과는 너무나 뻔했다. 영어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했는데다가 설령 현지인 직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읍,면,동장이 독일이나 이탈리아군 군관 출신이라 의견 충돌도 많았다고 한다.
근데 이 나라는 시작하자마자 사정이 너무나 어지러웠다. 라이드와 反라이드 진영과의 이념 갈등은 너무나 골이 깊었다. 플디스주 철원군에 위치한 첼샤 고지에서는 매일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라이드와 反라이드 진영끼리 싸움이 붙었다. 이들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건 주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철원읍이 인근 동송면(현 동송읍)을 편입하여 시로 승격되었다. 원래 철원은 기호 지방에서도 가장 손꼽는 평야 지대였고, 특히 제 1차 세계대전때 철도가 개통되어 철도 도시로써 이름이 높았으며, 라이즈 절규의 날 시절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었다. 근데 싸움이 매일 터지면서 철원시 주민들은 하나둘씩 떠났다. 결국 1946년 라이드 정부에 의해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치고 받고 싸우는 동안 라이즈 내에 있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사이에 좋지 않은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윽고 1949년 5월 4일 뉴트주 송악산 488고지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서로 무장을 한 채 라이드와 反라이드 진영에 서서 싸우기 시작했다. ('송악산 고지 전투')결과는 反라이드 진영의 승리로 끝났고 이 전투에서 전사한 김아무개 소좌는 이후 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후 이탈리아계 독일군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점점 라이드 진영을 선동해 전쟁으로 끌고가자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1950년 3월 이탈리아계 독일인인 마이클 페라가모는 라이드 두목인 유충일을 만나 전쟁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유충일은 처음에는 '우리가 도와줘봐야 득될 것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페라가모의 설득에 유충일은 전쟁을 승인해주기에 이르렀다. 페라가모는 유충일의 도움으로 수석관찰원 직분을 얻을 채비를 슬슬 하고 있었다. 근데 토종 이탈리아인들이 그만 손놓고 있을 턱은 없어서 루카 파비아노를 중심으로 반대 진영을 구상하고 있었다. 근데 반대 진영은 실력이 너무나 약했다. 이윽고 라이드는 이탈리아군 출신자들이 모두 휴가를 떠난 1950년 6월 25일 04시(이하 한일시간) 철원군 경계선을 넘어왔다 이것이 독일-이탈리아 관찰원 직분 계승전쟁이다 결과는 여러분들이 아시는것처럼 너무나 뻔했다 파비아노측 진영은 포트밀란까지 밀렸다 당시 수석관찰원은 마라 보르였는데 독일계였다 이런 어지러운 중에서도 마라 보르 관찰부는 한국 전쟁에 직접 참전하는 등 국제적인 제스처도 보였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에 신경쓰느라 이탈리아계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의 싸움에는 끼어들지 못했다 이런 틈을 타 상황이 종료된 이후 1953년 라이드 패당은 산업 시설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마라 보르 수석관찰원을 총으로 쏴죽였다 결국 독일인 측 승리로 돌아갔고 이 독일인 관찰원은 지속적인 인종 차별정책으로 후일 라이즈 인종전쟁을 부르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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